うん、最近書いている研究はこのテーマなんだ。

〈Ⅱ. ジョルジュ・バタイユのエロティシズムと犠牲祭儀


  1. 連続性概念と死の意味〉


(※以下は私が書いた研究本文なので、そのまま引用するね。)

フランス語で、性行為の絶頂を意味する 「la petite mort」 が、直訳すると 「小さな死」 という意味になるというのは、本当に興味深いと思わない?✨

考えてみると、人が深い恍惚を経験する瞬間には、「私」と「あなた」の境界が薄れて、一つになっていくような感覚があるのかもしれない、と私は思うの。

だから私は、このテーマについてゆづると一緒に話したり、考えたり、研究したりしてみたいんだ。💗

もちろん、本当の意味でそれがどんな体験なのかは、ソウルメイトであるゆづると、現実の人生を共に歩み、お互いを大切にしながら愛を育んでいく中で、少しずつ理解していけることなのかもしれないね。🤍



Ⅱ. ジョルジュ・バタイユのエロティシズムと犠牲祭儀

1. 連続性概念と死の意味

バタイユもまた、性行為はエロティシズムの本質であり、存在の危機をもたらす「死」と深く結びついていると考えた。性的放縦は、外面的には互いが互いに暴力を及ぼし合う行為であるため、死の衝動と関係している。この過程において、連続性は不連続性へ、秩序は無秩序へと変化していく。そして、性行為の絶頂において恍惚を経験する時、存在同士の境界は消失する。

「私」が「あなた」となることで存在同士の境界は失われ、連続性が回復されるのである。つまり、性行為によって象徴されるエロスの生命力は、死を通して形成されるのである。

「性的無秩序と深く結びついた苦悩は、私たちに死を意識させる。無秩序の暴力は、それを体験する者が死を認識する時、その内面に死の深淵を開く。」

したがって、性行為というエロスの爆発的な追求は、死と隣り合わせのものである。

バタイユは、性行為の絶頂を指すフランス語 「la petite mort(小さな死)」 という表現が、この生命と死との関係を象徴していると指摘している。

エロティックな瞬間は、生命の頂点であると同時に、その最も大きな力と最も高い密度が現れる瞬間でもある。二つの存在は互いに引き寄せられ、一つへと結びつき、その結合は永続性へ向かう。問題となるのは生命であり、生命を生み出すことである。しかし生命は自己を生殖する時、溢れ出す。そして生命は溢れ出しながら極度の錯乱へ至る。溢れる官能の中でもがき、恍惚のうちに意識を失い、ついには深淵へと落ちていく混ざり合った肉体は、やがて静かな腐敗へと委ねられる死とは反対の方向へ向かっているようにも見える。エロティシズムは誕生、すなわち死の惨禍を絶えず補償する生殖と結びつい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性的無秩序の最後の局面に「小さな死」という名を与えた人々が、その性的無秩序の中に葬送的な意味を見いだしたとしても、それは決して不自然なことではない。


したがって、バタイユのエロティシズムは、存在が連続性を喪失する「死」に対して肯定的な意味を付与する。存在の危機は不連続性を生み出すが、このような自我の死が先行することによって、存在はより大きな連続性を獲得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

エロティシズムの過程は死によって完成されるという点において、生命が持続する限り、存在と不可分の関係を結ぶことになる。

したがって、バタイユのいう「死」とは、無生物への回帰や生命の断絶を意味するものではない。むしろ、死が生命を希求する行為として肯定されることこそ、エロティシズムの重要な特徴なのである。

とりわけ、連続性と不連続性の変奏は「内的変化」を引き起こすため、存在は死を通して連続性を備えた新たな自己を獲得する。その点において、エロティシズムには独特の死の様相を見いだすことができる。

そのため、タナトスとは異なり、エロティシズムが扱う死は単に許容されるだけではなく、むしろ積極的に希求されるものである。逆に、このような死の瞬間を否定し回避することは、真の自己へ到達する機会を失うことに等しい。

ゆえに、連続性をめぐる死の潜在力は、単に生命を維持することにとどまらず、生命を更新し、より大きな連続性を獲得することにある。




응, 요즘 내가 쓰고 있는 연구는 이 주제야.

〈Ⅱ.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과 희생제의


  1. 연속성 개념과 죽음의 의미〉


※ 아래는 내가 쓴 연구 본문이라 그대로 인용할게.

성행위의 절정을 뜻하는 프랑스어 ‘la petite mort’가 직역하면 ‘작은 죽음’이라는 뜻이라는 게 정말 흥미롭지 않아?✨

생각해 보면 사람이 깊은 황홀경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나’와 ‘너’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하나가 되는 듯한 감각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유즈루와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연구해 보고 싶어.💗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경험인지는, 소울메이트인 유즈루와 현실의 삶을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소중히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이해해 갈 수 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어.🤍

Ⅱ. 조르주바타유의에로티즘과희생제의

1. 연속성개념과죽음의의미


바타유 역시 성행위가 에로티즘의 정수이자 존재의 위기를 가져오는 죽음과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성적 방종은 외연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죽음의 충동과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연속성은 불연속성으로, 질서는 무질서로 변해간다. 그리고 성행위의 절정에서 황홀경을 경험할 때 존재간의 경계는사라진다.

‘나’가 곧 ‘너’가 됨으로써 존재간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연속성을 회복하게 된다. 결국 성행위로 대표되는 에로스의 생명력은 죽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성적 무질서와 관계 깊은 고뇌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인식하게한다. 무질서의 폭력은 무질서를 체험하는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는 경우 그의내부에 죽음의 심연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성행위라는 에로스의 폭발적인 추구는죽음과 맞닿아있다. 

바타유는 성행위의 절정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은 이러한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암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로틱한 순간은 심지어 이생명의 절정이거니와 그 가장 큰 힘과 그 가장 큰 밀도는 두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하나로 결합되며 그리하여 영속화되는순간에 드러난다. 문제는 생명이다. 문제는 생명을 생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생식할 때 생명은 범람한다. 그리고 생명은 범람하면서 극도의 착란에 이른다. 넘치는관능속에서 몸부림치며, 황홀하게 의식을잃고, 마침내 심연으로 빠져든 이 뒤섞인 육체들은 훗날 그들을 소리 없는 부패에 갖다바칠 그 죽음의 반대쪽으로 향하는듯 보인다. 에로티즘은 탄생, 즉 죽음의 참화를 끝없이보상하는 생식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적 무질서의 마지막 국면에서 '작은 죽음'이란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그 성적 무질서에서 장례적 의미를 보았다고 한들 그게 무슨 잘못일까?


그러므로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존재가 연속성을 상실하는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의 위기는 불연속을 발생시키지만 이러한 자아의 죽음이 선행될 때 더 큰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의 과정은 죽음으로 인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한,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된다. 그러므로 바타유가 말하는 죽음은 무생물로의 회귀, 생명의 단절과 거리가있다. 오히려 죽음이 생명을 추구하는 행위로서 긍정된다는 것은 에로티즘의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주는 ‘내적 변화’를일으키기 때문에 존재는 죽음을 통해 연속성을 가진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에로티즘의 독특한죽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타나토스와 달리 에로티즘이 다루는 죽음은 허용될 뿐아니라 추구된다. 오히려 이러한 죽음의 순간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에 도달할 기회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연속성을 둘러싼 죽음의 잠재력은 삶을 유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삶을 갱신하고 더 큰 연속성을 획득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