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상
내 그림이 성별, 인종,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작품으로만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뭐 대단한 백그라운드는 있지도 않고 그저 동아시아권에서 태어난 싱글 여성이다. 내가 갖은 것은 나밖에 없다. 나는 보호받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에 문제가 생기면 상황에 압도되기보다는, 감정을 치우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헤쳐갈 수 있을지 분석하고 그대로 움직이는 것에 특화된 사람이다. 수년간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일하고 공부하고 그림 그리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으면 그대로 하면 된다. 스트레스 상황을 노르아드레날린 생성 활성 상태로 전환해서 교감신경 시스템을 높은 각성 상태로 유지한 채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뇌의 배외측 전전두피질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요소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을 버텼던 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한다. 내 손목 인대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손등, 손가락뼈가 휘어서 얼마나 아픈지 이런 건 내가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체외 충격파 치료를 하면 일단 손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우선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 내가 언젠가 잘 된다면 나와 같은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반드시 지원하리라 마음먹고 저 유리천장을 반드시 부셔보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은 어디에 놓였을까.
나는 내가 작업을 할 때 감정을 빼고 그대로 진행하는 기계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마냥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몇 번이나 그림을 엎고 캔버스 천을 뜯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고 나니까 나도 마음에 휘둘리긴 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지금은 계획대로 그림을 진행 중이다. 내 원래 페이스대로 진행해서 완성해야지.
음.. 전환점이 마련되면 좋겠다. 내가 죽을힘을 다해 갖은 애를 써서 겨우 어떤 찬스를 따내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번쯤은 외부에 의해 어떤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앞으로 한 끗 차이일 것이라고 느껴지는 건 지금 내게 어떤 외부의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고 놓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어서인 것 같다. 발레에는 파드 두라는 것이 있다. 두 명의 댄서가 호흡을 맞춰서 극도로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자력으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거의 다 소진했으니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챕터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한번이라도 주어진다면 무언가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여태까진 계속 혼자서 달려왔었고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할 만큼 다 해본 것 같아서… 하지만 나를 가까이서 지지해 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작업을 통해 교류하며 자연히 서로를 향한 교감과 이해가 더해진다는 것은 무수한 인과관계 속에서 나와 상대의 삶의 곡선이 교차되는 순간에 의미가 발생하는 거고, 그 필연적 과정을 통해 각자의 세계, 내 세계 역시 확장되면서 스스로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상황이 바뀌어봤으면 좋겠다. 일생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원하는 일이, 혹은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과값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벌써 9월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해가고 있다. 웃기게도 괴로운 와중에도 내 머리는 뭐가 맞는 방향인지 찾기 위해 빠르게 돌아간다.
내 어릴 때 사진을 보고 있자니 커서 겨우 내가 되려고 그 고생을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선생님들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홀로 참 잘 자란 것 같기도 하다. 그간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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